농민신문

　9일은 569돌 되는 한글날이다. 한글의 우수성이야 새삼 강조하지 않아도 모르는 이가 없을 터. 14개의 자음과 10개의 모음으로 이뤄져 표현할 수 있는 소리가 1만개가 넘고 학력이 높지 않은 사람도 금방 배울 수 있는 문자라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뿐. 우리 말과 글의 소중함에 대해 진정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게 현실이다.

　

　# 만약 한글이 없었다면

　지금은 우리 고유의 문자로 확고히 자리 잡았지만, 한글의 역사는 600년이 채 안 된다. 훈민정음이 만들어지기 전 우리는 한자 원문을 쓰거나 차자표기(借字表記)를 이용했다. 차자표기는 우리말을 한자로 나타내는 방법으로, 이두·구결·향찰이 대표적이다.

　구결은 중국 어순으로 된 한자 원문에 이해를 돕기 위한 조사를 끼워넣은 것을 말한다. 이두는 한자 원문을 순우리말로 바꾼 다음 조사·어미를 추가하는 방법이고, 향찰은 한자의 음(音)과 훈(訓)을 빌려 쓴 형태로 주로 노래를 기록할 때 쓰였다. 이 세가지는 모두 중국의 말·문자가 바탕인 만큼 순우리말을 표현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만약 한글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최근 중장년층에게 큰 인기를 얻은 유행가 ‘내 나이가 어때서’의 가사는 이렇게 쓰였을지 모른다.

　‘也 也 也 內 伊可 語對西… 思郞河基 多岳 調銀 因待(야 야 야 내 나이가 어대서…사랑하기 다악 조은 나인대).’ 원곡대로라면 ‘어대서’는 ‘어때서’, ‘다악’은 ‘딱’이지만 한자로는 그렇게 표현하기 쉽지 않다.

　한자가 아닌 로마자를 사용했다면 ‘ya ya ya nae na―i ga u-ddae-seo…sarang hagi ddak joeun nain-de’로 쓰였을 것이다. 이때 ‘u-ddae-seo’는 ‘어때서’ ‘유때세오’로, ‘joeun’은 ‘조은’ ‘조이은’ 등으로 다르게 읽힐 수 있다. 로마자는 읽는 사람에 따라 발음이 제각각일 수 있어서다.

　이처럼 우리말을 나타낼 문자로는 한글만 한 게 없다. 한글이 창제되지 않았다면 어색한 발음으로 유행가를 흥얼대는 모습이 단지 코미디 프로그램 속 모습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 소중함 잊고 있는 건 아닌지

그러나 한글은 예로부터 적지 않은 수난을 겪어왔다. 한글이 창제됐음에도 당시 조선의 지배층들은 여전히 한자를 주류문자로 여겼다. 근대에 들어서도 이런 상황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우리말 바로 쓰기에 평생을 바친 아동문학가 고(故) 이오덕 선생은 독립선언문에서도 한글이 수난을 당했다고 지적한다. ‘오등은 자에 아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 이는 외국 문서의 번역문이 아닌 3·1 독립선언문의 첫머리다. 한자어를 단순히 우리글로 옮겨쓴 문장이어서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이오덕 선생은 ‘우리는 여기서 우리 조선이 독립국임과 조선사람이 스스로 주인 된 백성임을 선언하노라’라고 썼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모바일과 인터넷 기술이 발달한 현대에 들어서는 편리성을 추구하면서 한글 파괴현상마저 일어나고 있다. ‘심쿵’(심장이 쿵쾅거린다), ‘핵노잼’(무척 재미없다), ‘케미’(사람 사이의 끌리는 감정) 등 언뜻 들어서는 뜻을 알기 어려운 신조어들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타고 급속도로 퍼진다. ‘ㄴㄴ’(NO NO), ‘ㅇㅇ’(응응), ‘ㄱㅅ’(감사), ‘ㅊㅋ’(축하) 등 모음이 아예 없는 단어도 젊은층을 중심으로 폭넓게 쓰이는 중이다. 이 같은 한글 파괴현상은 세대 간 소통을 막고 문화단절 현상을 가져올 수 있다.

　길거리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시나브로 한글 간판이 사라지고 있는 것. 한글문화연대에 따르면 지난해 서울·부산 등 전국 13곳의 간판 3만9566개를 조사한 결과 한글과 외국 문자를 함께 적은 간판이 1만4035개(35%)나 됐다. 간판 3개 중 1개는 순수한 한글 간판이 아닌 셈. 한글이 아예 적혀 있지 않은 간판도 상당수였다.

　이건범 한글문화연대 대표는 “간판은 노출도가 높은 매체”라며 “외국어 간판을 자주 접할수록 한글보다 외국어를 친근하고 세련되게 여길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말과 글은 단순한 표현수단을 넘어 민족의 문화를 상징한다. 독일의 언어학자 에칼트 박사는 “그 나라의 문자로 그 민족의 문화를 측정한다면 한글을 사용하는 한민족이야말로 단연코 세계 최고의 문화민족”이라고 했다.

　1926년 처음 제정된 한글날은 1991년 쉬는 날이 지나치게 많다는 이유로 공휴일에서 제외됐다가 2013년 재지정됐다. 1년에 하루만이라도 일을 멈추고 쉬면서 한글의 가치를 되새겨보라는 뜻이 아닐까.

　◇참고서적=<우리글 바로쓰기>(이오덕 지음, 한글사)

　김재욱, 사진=김병진 기자 kjw89082@nongmin.com